인물학습

나는 나를 베팅한다. 김상경(국내 최초의 외환딜러)

해선매니저박하림 2023. 8. 30. 09:45

 

안녕하세요 

오늘은 국내 최초의 여성 외환딜러로 유명한 김상경님의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김상경 한국국제금융연수원장- 1뒤에 0을 20개 쓰고 돈달라했죠.

외환 딜러 1세대로 유명…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승부수 던져야...

'연봉 2억원, 외환딜러 1세대.' 1992년 3월께 한 유력 일간지 경제란에 컬러판 기획기사로 실린 제목이다.

'국내 외환딜러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이하 아멕스)은행 외환딜러실 지배인 김상경씨가 부하직원 6명을 이끌고 지난해 430만 달러(33억원가량)에 이르는 순익을 소속 은행에 안겨줬다'

한국국제금융연수원의 김수경(73) 원장의 나이 43세 때 이야기다.그는 마흔이 환갑이라는 딜러 세계에 32세의 늦은 나이로 뛰어들어, 3년만에 치프 딜러까지 승진했다. 다시 8년 만에 부지점장급까지 올랐었다. 당시 신문기사가 나가자 은행은 그의 사진과 기사를 영어로 번역, 아멕스 사보 겉표지에 실어 세계의 지점으로 발송했다. 커버제목은 '최고의 실적, 최고의 딜러'였다.

김 원장은 최고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이후로도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나갔다. 그는 아멕스 은행의 14년 딜러생활을 접고 잠시 중국은행의 치프딜러를 거친 후 95년 10월 아예 한국국제금융연수원을 차렸다. 은행 연수원이 수두룩하던 때였다. 사립 연수원을 이끈다는 건 웬만한 인맥과 경쟁력을 갖추지 않고는 힘든 사업이다. 게다가 국제금융은 생소한 분야였다. 그가 모험을 한 이유는 10년 앞을 내다봤기 때문이다.

"은퇴하기엔 이른 시기였지만 10년,20년 뒤까지도 할 일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위험부담이 크다고 모두 말렸지만 밀어붙였어요."

 

손실한도선 내에서 베팅

그의 배짱은 업계에서 '큰손'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했다. 외환보유액이 풍족하지 않았던 80년대 초반 환율 인상이 있던 때 일이다. 시중 자금이 부족한 일반 은행들이 한국은행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당시 김 원장은 한국은행에 모인 100명이 넘는 딜러들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한국은행에서 빌려줄 수 있는 돈은 한정돼 있었기 때문에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은행이 많지 않았어요. 우선 쪽지에 딜러들이 필요한 콜 머니와 콜 론 액수를 써내면 브로커들이 큰 금액을 쓴 은행에 우선권을 주는 거였죠. 그때 저는 무슨 배짱이었는지 1을 써놓고 동그라미 20개를(1해원)를 적어 냈어요. 세지도 못할 암청난 단위였죠. 한국은행 관계자가 저를 첫 번째로 부르더니 호통을 치더라고요. 무슨 여자가 배포가 그리 크냐고요. 결국 호통은 들었지만 저희 은행이 가장 많은 돈(80억 상당)을 빌려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제게 붙은 별명이 큰손입니다."(웃음)

그는 배포는 컸지만 무모한 모험을 하지는 않았다. 경제학에는 얼씬도 못 해본 사학과 출신이 딜러세계에 도전장을 내밀고, 은행의 고위직 자리를 박차고 연수원 사업을 차린 것 역시 신중하게 계산된 베팅이였다.

"미국은행은 딜러들이 딜을 할 때 손실한도액을 초과할 수 없게 룰을 정해놓습니다. 한도를 넘기면 해고 사유가 돼요. 더 이익을 낼 수 있을 것 같아도 무조건 계속 모험을 하게 만들지는 않죠. 항상 손실한도액을 염두에 두고 딜링을 했기 때문에 큰 손해를 본 적은 없었습니다. 국내 은행은 손실한도가 없었기 때문에 대형 사고가 많이 났던 겁니다. 인생에서의 베팅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승부수를 던졌을 때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까지인지 미리 가늠해보는거죠."

김 원장이 남성들도 하기 힘든 딜러 생활을 버텨내는 것도 모자라 승승장구한 비결에 대해 그의 측근들은 타고난 승부근성과 인내심 때문이라고 평했다. 그와는 20년 지기인 장광용 한국국제금융원고문(전 금융감독원 기획조정실장)의 말을 들어보자.

"금융업계에서 김 원장은 또순이, 독일병정으로 통했습니다. 목표를 세우면 일단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능력이 남자들을 항상 능가했죠. 모두 뜯어 말렸던 연수원 사업을 성공시킨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낙천적인 성격도 스트레스 많은 딜러 생활을 버티게 해줬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이기고 지는 싸움을 반복하면서 그는 매번 실패에 연연할 수는 없었다.

"딜링이 도박이 아닌 생활이 되게 하려면 잊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전날 시세와 거래내역에 집착하면 어떻게 버티겠어요? 항상 마음속으로 '오늘은 그닥 나쁘지 않아'(Not bad Today)라고 외치며 투지를 다졌죠."

80년대 초반, 그가 아멕스 은행의 치프 딜러가 된 직후 미국 본점에서 한국 외환시장의 조사를 나왔을 때다. 본점 임원은 김 원장과 같이 한국은행을 방문할 것을 제의했다. 그런데 한국은행을 담당하고 있던 아멕스 은행의 지점 매니저가 임원에게 "중앙은행인데 어떻게 여자하고 같이 가겠느냐?"고 거절했다. 김 원장은 그때 속으로 결심했다.

"앞으로 한국은행뿐 아니라 그 어떤 정부 기관과도 당신보다 훨씬 나은 관계를 맺게 될 거라고."

'10년은 기본'인 인맥관리

그때의 결심이 큰 영향을 미친걸까. 그의 폭넓은 인맥 관리는 업계에서도 유명하다. 일단 인연을 맺으면 10년, 20년이 기본이다. 신한은행의 신상훈 행장과도 초년병 시절부터 맺어온 인연이다. 김 원장은 현재 여성금융네트워크의 회장직도 맡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그가 만나온 금융인들은 현재업계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지금 연수원 사업의 주 고객이 됐다.

 

 

학력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졸업(학사)

서강대학교 경제대학원 국제경제 전공(MBA)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세계 경제최고전략과정 수료

주요 경력

스탠다드차타드 은행, 행원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은행이사

중국은행 자금부, 치프 딜러

전) 한국외환은행 사외이사

전) 경기대학교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전) 금융감독원 '제재심의위원회' 위원

전) 기획재정부 '연기금 투자풀 운영위원회' 위원

현) 한국국제금융연수원 대표이사

현) (사) 여성금융인네트워크 회장

현) 서울시 후생복지위원회 위원)

현) 메리츠 자산운용 사외이사

현 ) 한국금융연구센터 사외이사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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